본문 바로가기
음악 리뷰

바그너 <니벨룽겐의 반지> -독일 만하임 국립오페라극장 초청 공연 후기

by 리날도 2022. 10. 24.

국내 바그네리안(Wagnerian)들에게 설레는 소식이 들려왔다. 2005년 마린스키 이후 국내에서 최초로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4부작 전체를 4일에 걸쳐 대구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이었다. 거기다 독일 만하임 국립오페라극장의 오케스트라, 성악진, 연출, 스태프 전부를 초청해 공연한다는 정보를 듣고 이 공연은 국내에서 다시 보기 힘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을 해 4개의 공연을 전부 다 예매했다. 춘천에 사는 나로서는 대구로 이동해서 4부작 전부를 보기에 쉽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 공연을 보기 위해서라면야 거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나는 2022년 10월, 바그너의 대작 <니벨룽겐의 반지>를 보러 경건한 마음으로 대구에 향했다.

10/16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이 작품은 바그너 <니벨룽겐의 반지> 중 전야제, 즉 본격적인 무대극이 시작되기 전인 제전극에 해당하는데 전체 스트리에 대한 배경(introduction)을 2시간 반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진다.

대구오페라하우스 내부

<라인의 황금> 공연은 전반적으로 성악진, 오케스트라, 연출 다 훌륭했지만 유독 인상적이었던 것은 연출가 요나 킴의 연출이었다. 그녀의 연출은 기존의 틀을 깬 미니멀리스트적 연출을 보여주었다. 무대 자체가 간소했고 상징적인 소재들만 최소화로 배치하여 의문이 많이 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오페라를 많이 접해봐서 그런지 이런 연출을 보며 생각해볼 점이 많은 흥미로운 연출이었다.

<라인의 황금> -출처: swr

보탄의 창이나 용, 두꺼비, 황금과 같은 핵심 소재들이 과감하게 생략되었고 주로 다양한 악기들로 여러 소재들로 표현한 부분이 눈에 띄었는데 악기들을 무대에 배치한 이유는 연출자 왈 오케스트라가 <반지> 이야기의 전지전능한 화자이며 이 화자는 음악의 장대한 산맥 속으로 동반하고 안내해준다는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인상 깊었던 연출은 두 거인, 파졸트와 파프너가 더블베이스를 창처럼 들고 있었는데(위 사진) 끝부분에서 파프너가 파졸트를 더블베이스를 정면으로 때리며 죽인 장면과 마지막으로 신들이 발할라 성으로 올라가는 기존 장면을 레드카펫 위에서 온갖 포즈를 취하며 도도하게 워킹(?)하는 셀러브리티들로 빗대어 표현하며 이들은 신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전혀 모른 채 현재에 도취되어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로 표현한 점 또한 재미있었다.

 

첫날 <라인의 황금>은 파격적인 연출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라인의 황금> 커튼콜

10/17 <발퀴레(Die Walküre)>

<라인의 황금> 다음 이야기이자 본격적인 무대극의 첫번째 작품인 <발퀴레>는 길이가 쉬는 시간 포함해서 5시간이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길이가 5시간이나 되는 만큼 음악적으로 굉장히 정교하고 완벽하게 <니벨룽겐의 반지> 중에 가장 인기가 높은 작품이다. 

이날 <발퀴레> 공연은 음악적 명성과 맞게 성악진, 오케스트라, 연출 이 3박자가 완벽하게 떨어진 공연이었다. 그중에 베스트를 꼽자면 이번에는 가수들이었는데 가수들 모두가 아주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가수는 지글린데와 브륀힐데 역을 맡은 가수였는데 브륀힐데 역을 맡은 다라 홉스는 바그네리안 가수임을 여김 없이 증명했고 성량도 파워풀할 뿐만 아니라 감동적인 장면에서는 그에 맞는 목소리를 선사하며 굉장한 인상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지글린데 역 가수

그리고 지글린데 역을 맡은 분은 여리여리한 체형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소리와 동시에 깊은 목소리를 내며 정말 충격적으로 잘 불렀다. 특히 2막에서 실성하는 장면과 3막의 지그문트를 잃은 슬픔에 절규하는 장면은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압권! 그 밖에도 보탄 같은 경우는 어제 <라인의 황금>에서 좀 실망스러웠는데 발퀴레에서 보탄은 보탄다운 진중하고 카리스마 있는 강렬한 목소리로 굉장했다. (알고 보니 다른 가수가 불렀던 것!)

<발퀴레> 중 한 장면 - 출처: &copy; CHRISTIAN KLEINER

또한 오케스트라 연주 또한 전날에 비해 유독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놀란 부분은 튜바, 트럼본, 트럼펫 등의 관악기가 실수 없이 빵빵 터졌을 때였다. 한국 오케스트라에서는 들을 수 없는 시원한 연주가 가미되니까 정말 바그너 오페라를 듣는 것 같았다. 물론 <발퀴레>는 음악 자체가 너무나 다채롭고 아름다워서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몰입도가 생기는데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너무 잘하니까 그 몰입도가 최고조에 다다랐다. (연출도 좋았지만 성악진과 오케스트라 너무 뛰어나서 상대적으로 기억에 잘 안 남았다...)

<발퀴레> 커튼콜

10/19 <지크프리트(Siegfried)>

<니벨룽겐의 반지>의 3번째 오페라인 <지크프리트>는 반지 4부작 중에서 <발퀴레>나 <신들의 황혼>에 비해 인지도가 조금 떨어지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도 <지크프리트>가 가장 낯설었기 때문에 5시간 동안 완벽하게 몰입하며 감상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공연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은 한낯 기우에 불과했다.

<발퀴레>와 마찬가지로 러닝타임이 5시간이었던 <지그프리트>

<지크프리트>에서는 주인공 지크프리트를 비롯해 동굴 속의 용, 칼, 난쟁이, 숲 속의 새 등 정말 다양한 주제곡들이 등장하는데 그런 부분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감상하는 재미가 유독 쏠쏠했던 공연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발퀴레> 공연에 비해서 성악진들이 약간 아쉬웠다. 주인공 지크프리트 역 맡은 크리스티안 프란츠는 약간 억지로 고음을 지르려는 듯해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신들의 왕인 보탄, 난쟁이 미매, 용으로 변신한 거인 파프너를 맡았던 가수들은 모두 자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그래도 <발퀴레>에 비해선 전체적으로 아쉬웠다.

<지그프리트> 중 한 장면 - 출처: &copy;&nbsp;Maximilian Borchardt

성악가가 뭔가 약간 아쉬웠던 반면 오케스트라는 이날도 완벽했다. 특히 관악기, 그중에서 튜바와 호른은 압권이었다. 2막 처음에 나오는 북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섬뜩한 튜바 소리는 파프너의 음침한 동굴이 연상되는데 튜바 연주자가 이 부분에서 연주를 기가 막히게 잘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 주제곡에서는 전용 호른이 사용되는데 어쩜 그렇게 소리가 맑고 천진난만한지… 지크프리트의 영웅적인 면과 천진난만한 면이 동시에 느껴지는 아주 훌륭한 연주였다. 알고 보니 만하임 음대 교수를 특별히 초빙해 그분이 호른을 연주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튜바와 호른이 연신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핵심이자 하이라이트였다.

 

연출에서는 용, 칼(노퉁) 등 핵심적인 요소들을 과감하게 생략해 앞선 오페라와 비슷한 흐름을 보여줬지만 유독 <지크프리트>에 신비한 요소가 많아서 그런지 이번 연출은 몰입감을 떨어지게 만들었다. 거의 대부분을 성악가들의 마임(?)으로 표현하는데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약간 실망스러운 연출이었지만 인상적이었던 부분도 있었다. 빨갛게 분장을 한 파프너를 무대 뒤에 배치하고 죽을 때는 붉은 조명을 비추는데 섬뜩한 음악과 어우러져 짜릿한 공포를 느끼게 해 주는데 효과적이었다.

<지그프리트> 커튼콜

10/23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

<신들의 황혼>은 반지 4부작의 마지막 작품이자 4부작 중 가장 음악적으로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날 공연을 보러 찾아온 관객들이 유독 많았고 분위기도 제일 엄숙했다. 

무대 시작 전 세 명의 노른(Norn)들이 미리 나와 동작을 취함 (연출적인 의도로 보여짐!)

이날 공연은 큰 기대와 부응하게 오케스트라와 성악진 아주아주 훌륭했다. 오케스트라는 알렉산더 소디(Alexander Soddy)의 안정적인 지휘 아래 5시간 동안 흔들림 없이 최상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특히 튜바와 호른 같은 관악기 소리가 인상 깊었는데 하겐 주제곡에서 울려 퍼지는 관악기 소리는 압권이었다. 하겐 역은 낮은 저음의 베이스가 맡는데 깊은 저음과 함께 울려퍼지는 튜바 소리는 정말 섬뜩했다. 4부작 통틀어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고 기대되었던 음악은 <신들의 황혼>의 지크프리트 장송곡부터 브륀힐데의 숭고한 희생과 함께 신들의 세계가 몰락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는 마무리 장면까지인데 역시나 음악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웠고 여기에 완벽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더해지니 감동이 배가 되었다. 

<신들의 황혼>의 MVP, 하겐 역의 전승현 선생님

성 악진 또한 모두가 다 너무 훌륭했는데 인상 깊었던 두 가수를 뽑자면 하겐 역을 맡은 전승현 선생님과 브륀힐데 역을 맡은 다라 홉스였다. 하겐 역의 전승현 선생님은 모든 가수들 중에 가장 안정적이었고 낮은 음역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사운드는 하겐 역과 완전 찰떡이었다. 4부작 통틀어서 낮은 음역대의 베이스 역할 맡은 배우들 중에서는 단연코 원탑이었다. 그리고 브륀힐데 역을 맡은 다라 홉스는 지치지도 않나 보다. 세 공연 연속으로 비중이 높은 브륀힐데 역을 맡았는데도 흔들림 없이 소화하면서 감탄을 자아냈다. 특히 <신들의 황혼>에서 절정이었는데 마지막에 그 유명한 브륀힐데 독백 장면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압권이었다. 

<신들의 황혼>의 또다른 MVP, 브륀힐데 역의 다라 홉스(Dara Hobbs)

감동적인 <신들의 황혼>의 마지막 장면을 끝으로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이 마무리되자 오케스트라 단원들, 성악진, 합창단, 연출 스태프들 모두 무대에 나와서 인사하는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단체가 한국에 와서 <니벨룽겐의 반지>를 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탄했고 그들에게 고마웠다. 유럽 현지에서도 18시간이나 되는 전체 오페라를 1주일 안에 공연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라는데 독일 만하임이라는 소도시의 오페라단이 이를 흔들림 없이 소화하는 것을 보고 독일이 정말 음악적 시스템이 잘되어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체감했다.

<신들의 황혼> 커튼콜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 전부를 한국에서 공연한 점은 한국 클래식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공연이라 생각하고 이 오페라를 실연으로 처음 접하는 나 자신에게도 가장 기억에 남을 공연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도 바그너 오페라를 한국에서 자주 접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