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20년 8월.
2020년은 클래식 음악 마니아들에게는 암울한 해였다. 코로나라는 유례없는 질병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공연장이 문을 닫아 음악을 라이브로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여름 즈음, 코로나가 여전히 유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재정적 손실을 극복하기 위해 유럽 공연 단체들은 조심스럽게 공연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 최고의 클래식 음악 페스티벌이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란 도시에서 펼쳐지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Salzburg Festival)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2020년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100주년이라 다른 해보다 훨씬 더 야심 차게 준비한 페스티벌이지만 코로나로 인해 취소될 위기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정부가 8월부터 공연 재개를 허용함에 따라 8월 1일부터 30일까지 총 한 달 동안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유럽에 거주했었던 나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공연 계획을 즐겁게 짜기 시작했다. 가장 우선적으로 보고 싶었던 공연은 오늘 소개해드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단막 오페라 <엘렉트라(Elektra)>였다. 이유는 이 오페라가 순전히 좋아서가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오케스트라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Wiener Philharmoniker)였고 지휘자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거장 프란츠 벨저 뫼스트(Franz Welser-Möst)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슈트라우스의 음악에 대해 잘 몰랐을뿐더러 오페라는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와 <살로메(Salome)>밖에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엘렉트라>는 나에게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연주하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라 생각해 무조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큰 문제에 직면했다. 당시 페스티벌의 화제작이라 티켓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그나마 남아있는 티켓 같은 경우 가격이 너무나 비쌌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려고 하는 와중에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학생들을 위한 티켓을 Ticket Gretchen이란 앱에서 따로 판매하는 것이었고 가격은 자리에 상관없이 전석 25유로(약 3만 원)였다.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앱에 들어가서 남은 좌석을 봤더니 가장 인기 있는 개막 공연에 젤 비싼 자리가 몇 개 남아있어서 그중에 하나를 재빠르게 겟했다. 그렇게 정말 운 좋게 좋은 자리를 싼 가격에 구한 나는 기분 좋게 잘츠부르크로 이동하였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기간에 잘츠부르크에 있는 다양한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는데 대표적인 공연장은 축제 대극장(Großes Festspielhaus), 모차르트회관(구 축제소극장, Haus für Mozart), 암벽 승마 극장(Felsenreitschule)이다. 이 중에 특이한 공연장은 암벽 승마 극장(Felsenreitschule)인데 승마 학교 뒤에 암반을 이용한 극장으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음악 대회가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출처: Wikipedia, HMAP) 그리고 바로 이 공연장에서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처음 열리는 오페라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 클래식 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무대라 그런지 캐스팅이 매우 화려했다. 일단 앞서 말했던 것처럼 오케스트라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프란츠 벨저 뫼스트(Franz Welser-Möst)였고 성악진 같은 경우 2년 전 잘츠부르크에서 <살로메>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소프라노 Asmik Grigorian이 엘렉트라의 여동생 Chrysothemis 역을 맡았다. 주인공 엘렉트라 역은 리투아니아의 떠오르는 성악가 Aušrine Stundyte가 맡았다. 연출은 파격적인 연출로 유명한 Krzysztof Warlikowski가 맡았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매년 파격적인 연출로 유명한 것을 감안했을 때 이 분이 적임자가 아닐까 싶었다.
오페라는 박수 없이 시작되었고 일반적으로 시작할 때 음악이 바로 나오는데 이 연출에서는 음악 없이 클라임네스트라가 아가맵논을 살해한 후 자신이 느낀 감정을 독백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 부분이 상당히 독특하고 인상적이었다. 또한 이 오페라 특성상 무대 공간 자체에서 벌어지지 않지만 인물들의 대사와 음악을 통해 관객들이 유추할 수 있는 장면(엘렉트라의 남동생 오레스트(Orest)가 자신의 어머니인 클라임네스트라(Klytämnestra)를 죽이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을 순간적으로 조명을 어둡게 해 박스 형태의 컴컴한 방 안에서 벌어지는 장면으로 연출한 것 역시 기억에 남는다. 이 장면 외에도 이 박스 형태의 방은 이 오페라 전체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밖에도 수영장, 샤워실, 나체의 여자 등 파격적인 요소들이 눈에 띄었고 오페라 내내 나오는 비디오 아트는 오페라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연출은 기존의 연출과는 완전히 새롭게 해석해 파격적인 연출다웠고 조명 효과로 인해 분위기 전환을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연출의 핵심 포인트였다.
성악진들은 기대 이상으로 매우 훌륭했다. 솔직히 이 오페라의 배역들은 소화하기가 성악적 측면에서 너무나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상당한 체력을 필요한 연기 또한 요구하기 때문에 웬만한 바그네리안 혹은 슈트라우스 오페라에 정통이 나있는 성악가가 아니라면 소화하기 힘든데 이번 캐스팅을 보면 그런 류의 성악가들은 솔직히 아니라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역을 맡은 Aušrine Stundyte는 광기에 사로잡힌 엘렉트라를 매우 잘 연기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성량을 자랑하며 이 역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절정에 다다른 부분에 혼신의 힘을 다한 듯한 강력한 목소리는 매우 매우 인상적이었다. 또한 Chrysothemis역을 맡은 Asmik Grigorian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둘 다 엄청난 목소리로 소화하기 힘든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엘렉트라>가 가장 지휘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연주하기도 힘든 오페라 중 하나로 유명한데 Franz Welser-Möst의 지휘와 빈 필하모닉의 연주는 두말할 것 없이 완벽했다. 관악기의 시원한 연주와 현악기의 화려한 연주는 오페라의 질을 한층 높였는데 특히 마지막에 나오는 엘렉트라의 광기의 춤과 Chrysothemis가 Orest를 처절하게 부르는 엔딩 신에서의 연주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벨저 뫼스트의 우아하고 깔끔한 지휘 아래 오케스트라는 이 오페라를 처음 보는 나조차 음악만 듣고 몰입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연주했다. 이 공연을 통해 다시 한번 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지 다시 한번 실감했고 이 완벽한 오케스트라가 오페라를 연주하면 오페라 연주만 들어도 감탄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제대로 느꼈다. 연출, 성악, 연주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내 생애 가장 좋았던 공연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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